지난 27일부터 30일까지 영국에서는 노동당의 정기 전당대회가 열렸다. 당의 방향성과 향후 전망을 논의하는 이 자리에서 노동당의 당수이자 현 영국 총리인 앤디 버넘의 연설은 폭풍과도 같았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총리가 “당당하게 영국의 사회주의적 개혁을 할 주춧돌을 놓았다”고 말했으며 이코노미스트는 버넘의 연설에서 제시된 정책들이 “급진적이며 매우 교조적이기도 하다”고 신랄히 비판했다. 그렇다면 버넘이 설정한 영국 노동당의 향후 방향성이 어떻길래 이런 말들이 나온 것일까?
전당대회의 폐막을 앞두고서 이루어진 총리의 연설에서 등장한 정책은 다음과 같다.
연금 인상의 기준이 되는 트리플 락의 폐지
영국의 연금은 1) 물가 상승률 2) 임금 상승률 3) 2.5%의 고정 비율 중 가장 높은 인상률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인상이 이루어진다. 이것을 소위 ‘트리플 락’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될 경우 연금 인상률이 2011년 이후 처음으로 임금 상승률보다 낮아진다. 대신 임금 상승률이 물가상승률 또는 2.5%보다 높을 경우, 연금이 평균 임금의 최소 30%는 될 수 있도록 하는 제한이 존재한다. 이렇게 할 경우 2040년까지 매년 150억 파운드(한화 약 267조원)를 절약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국민돌봄서비스의 창설
버넘은 영국의 국민 보건 서비스NHS¹와 유사한 형태의 국민 돌봄 서비스를 만들겠다고 이야기했다. 이는 NHS의 원칙인 “모두가 기여하고 모두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무상의” 원칙 아래에 움직이는 돌봄 정책을 의미한다. 다만 가디언의 분석에 따르면 이는 실질적으로는 스코틀랜드에서 현재 시행하고 있는 형태인 “돌봄노동 자체는 무료로 제공하되, 시설에 대한 비용은 개인이 지출하는” 형태가 될 확률이 높다고 한다. 또한 버넘은 같은 연설에서 돌봄노동을 이루는 노동자들에게 감사를 표했는데, 이 역시 단순한 표현이 아닌 앞으로 돌봄 노동자의 처지와 대우를 개선하는 실질적인 정책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정책은 2029년 총선 이후 새롭게 재편될 영국 국회에서 다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수도와 에너지의 재국유화
정확하게 “재국유화”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은 아니나. 버넘의 연설에 따르면 현행 수도 제도를 개편할 법안이 국회에 곧 제출될 것이며, 이는 “이념적인 이유로 수도에 대한 공공 소유를 폐기한 마거릿 대처의 선택”을 수정할 것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해서 현재 민영화 된 수도를 다시 국가 소유로 되돌리는 것이 쉬워지도록 파산법을 개정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버넘의 연설에서 여기까지 언급되지는 않았다.
선거제도 개혁
이는 현재의 1위투표제²보다 더 많은 이들의 표심이 반영될 수 있도록 선거제도 전반을 개혁하는 것을 말한다. 버넘은 현행 투표제도를 가리켜 “30%보다 안 되는 표를 가지고서 다우닝가 10번지에 들어올 수 있는” 제도라고 혹평한 바 있다. 앞서 말한 국민돌봄서비스와 유사하게 이 정책 역시 앞으로 노동당의 주요 공약으로 다루어질 것이며, 다가오는 2029년 총선이 있은 뒤의 새로운 국회에서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브렉시트의 완화, 또는 뒤집기
버넘은 “브렉시트가 가져온 이점보다 피해가 더 많았”다고 언급하며 브렉시트 이후 지지부진한 경제 성장률과 이민 규제의 부재를 언급했다. 다만 이와 관련해 연설에서는 구체적인 재가입을 시사하기보단 “유럽 파트너와의 장기적인 관계를 위한 다른 방향” 정도로만 언급되었다. (이후 30일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전당대회 연설 이후 진행된 인터뷰에서는 재가입 가능성까지도 시사했다고 한다.)
부동산 규제 강화
버넘은 가정의 기반으로서 집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며 지방 당국이 건설한 공공주택의 소유권을 구매하는 것을 앞으로 건설되는 집들에서 금지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장기 임대 주택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된 법안은 버넘에 따르면 크리스마스 이전에 국회에 제출될 것이다. 또한 집주인이 좋지 않은 품질의 주택을 ‘개선을 명령받았음에도 고치지 않고서’ 계속해서 임대할 경우, 지방 당국에서 강제적으로 그 소유를 구매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 역시 언급되었다.
버넘이 연설에서 제시한 모든 정책들은 차후 노동당의 공약에 반영될 것이며, 버넘 체제 아래에서의 노동당이 가지는 방향성을 결정짓게 된다. 여러 언론에서 이번 연설을 두고 ‘노동당의 금기red line’을 넘었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렇다면 이 연설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더라도, 공공이 할 수 있는 영역을 확대하고 규제를 강화하는 등 ‘신자유주의로부터의 대안’을 찾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국이 대처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한국 역시 IMF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앞으로 버넘의 정책을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다.
¹ 1948년 시작된 영국의 공공무상의료제도. “사용 시에는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무상의료가 특징이다.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응급·중증 환자에게만큼은 질 높은 의료가 무상으로 제공된다는 명백한 장점이 있다.
² First-past-the-post voting. 단순다수투표제라고도 불린다.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다면 그 후보가 과반을 넘지 않았더라도 선거의 승자로 인정하는 제도를 가리킨다.